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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1)'한글을 처음 배운 늦깍이 학생' 자서전 - ⑦ 유영분(새롬가정지원센터)
유영분  |  passionior@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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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31  14: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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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집 다섯째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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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충청북도 옥천군 천산면 고당리에서 할머니가 나를 받아 태어났다. 나는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우리집은 너무 가난했고 그 때문에 나는 가고 싶었던 학교에 가지 못했다. . 살기 힘들어서 어머니는 집안일을 나에게 맡기고 구걸을 나가셨다. 이웃에는 할아버지 내외가 사셨던 기억이 나고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친구들은 나한테 참으로 큰 존재였다. 형제들하고도 잘 어울렸지만 남동생과 한번 크게 다툰 기억이 나기도 한다.

    남한테 해를 끼치지 말라고 교육하신 아버지

    나는 어렸을 때 무엇이라고 잘 해내는 편이라  나무를 잘 해서 말려서 부엌에다 쌓아놓곤 하였다. 그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설날에 빨간 양말 한 켤레를 받았다. 너무 기뻐서 꼭 끌어안고 자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남의 집 살이만 하셨지만 우리에게 남한테 해를 끼치면 안된다고 가르치셨고 자식들 만큼은 잘되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의 어린시절 가장 기억나는게 있다면 엄마 빨래하는데 따라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뻔 한것과 전쟁중에 밤중에 두부를 하는데 인민군이 들어와서 두부 한판을 다 먹은 일이다.

    가난하지만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과 정겨운 시간들을 보냈는데, 결국 나는 열세살 때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그때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열세살부터 식모살이를 하고

    나는 13살부터 15살까지 남의집 살이를 했다. 아버지 역시 남의집 살이를 하고 오빠와 동생들은 집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빈둥거리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10대에 하고 싶었던 것은 돈 버는 것과 공부였다. 하지만 집이 너무 어려워서 공부는 포기했다. 나는 식모살이 하면서 돈을 벌었고 집안 살림도 참 많이 했다. 엄마가 나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약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는데 그 나이에 너무도 힘이 들었다. 또 냇가에 가서 골뱅이를 잡아 팔기도 했고 가을에는 메뚜기를 잡아서 볶아 시장에 내다 파는 일도 곧잘 했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가득한 우리 집, 우리 마을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 어머니하고 관계가 한없이 좋았고 아버지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셨다. 아버지는 나무를 하셨고 늦게 돌아오셨다. 봄에는 가족들이 보리밥 싸가지고 냇가에서 고동 잡아서 된장하고 고추장 풀어서 보글보글 끓여서는 잔디밭에 앉아서 먹곤 했다.
    나는 가족과 동네어른들로부터 많이 사랑을 받았다. 동네 어른들은 영분이는 시집가서 잘 살거야 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나 역시 시집가서 잘 살거라는 생각을 했다. 열두살 때 선생님 집에 가서 애기를 돌봐주라며 일을 맡긴 한 아저씨는 애기를 다 봐준 1년후에 "너는 참 착한 아이야"라고 말씀해주신 기억이 난다.

    열여덟에 시집을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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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8살 먹던 해 중매로 결혼을 했다. 신랑감이 우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간다는데 남편 될 사람 얼굴이 궁금해서 안방 문을 뚫고 보았다. 한번은 시댁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점심을 차려주셨다. 맛있게 먹고 신랑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잘 생겨서 내 눈에 들었다.

    결혼식을 다가오는데 하루는 엄마가 옷을 사 주신다고 해서 시장에 가서 엄마는 옷을 한 벌을, 나는 두벌을 샀다. 그 뒤 보름 만에 , 음력 29일 날 결혼을 했는데 결혼 후로 신랑은 나한테 정이 없이 굴었다. .

    옥천군 이원면 대원리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신혼생활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콩심고 팥심고 농사를 시작하여 힘들었고 신랑 얼굴 하나에 내가 반했지만 인정머리는 없었다.

    처음 힘들었을 시기는 나를 생각하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내가 너무 힘들어서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미워서 못 살겠어요” 신혼 때는 일 년 동안 떨어져 살았다. 그러다가 차차 마음이 돌아와서 조금씩 잘 지내다가 첫 딸 낳고는 완전히 돌아섰다. 신랑이 마음은 착했다. 그 뒤로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항상 행복하게 잘 지냈다. 아들 낳고 딸 낳고 6남매 낳아서 잘 자라 주었다

    고달픈 시집살이

    나는 시집가서 계속 농사를 짓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집에서 십리나 떨어진 곳으로 시집가서 첫날부터 집안일을 해야 했다. 너무 힘들어서 혼자 엉엉 울곤 했다. 39살까지는 남의 돈을 갖다 쓰고 새벽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많이 했다.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잘 모시면서 열심히 살았다. 내가 첫째 딸을 낳았는데 시어머님이 무척 좋아해주셨다. 하지만 시아버님은 성질이 까다로우시고 욱하는 것이 있으셔서 너무나도 힘들었다. 시아버지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했고 말대답 금지되었으며 한번 하려고 하는 것은 꼭 하셔야 성미가 풀리는 분이었다. 그 성격을 남편이 이어받은 것 같다. 지금 쓰러져 계신데 불쌍하다가도 성질을 부리면 미워진다. 하지만 시아버지나 남편이나 뒤 끝은 없는 사람이다.

    그 당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소가 새끼를 낳다가 죽어서 충격을 받은 것이 생각난다. 소는 재산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건 아주 큰일이다. 그 당시 키우던 개가 노루를 2마리 잡아온 적 있다. 아마 그래서 재앙이 내린 것 같다. 또 술을 너무 좋아해서 식구들 속을 엄청 썩였던 시동생이 이젠 결혼해서 잘 사는 게 참 신기하다. 경기도에 선을 보러갔다 오는 길에 술을 하도 먹어서 기차간에서 자꾸 떨어지려고 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30대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침에 나가면 해가 지고 어두컴컴해야 집에 왔고 동시섣달 얼어붙은 땅에서 눈뜨고 올라오는 나물 잎 뜯어다가 하루 종일 그 나물을 갖다 파느라 너무 힘들었다. 그때 이웃집 아줌마랑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를 받았던 생각이 난다., 막내딸을 낳았을 때는 집에 아무도 없어서 열네살 먹은 큰 딸이 미역국 끓여준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할 때 '그 때 돈 많이 벌고 잘 살았으면...'하는 생각도 들지만 후회는 없다. 자식들이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잠 안올 때 누워서 생각할 때가 있다. 힘든데 그냥 살짝 죽어버릴까... 하지만 자식들이 너무 착해서 생각을 접곤 한다.

    착하게 커준 아이들, 사랑스런 손주들

    아이들은 별로 말썽 없이 착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맏딸은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고 상도 잘 타왔다. 나는 그럴 때 참으로 자식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애들이 말을 안 들었을 때에도 나는 때리지는 않았다. 그냥 말로 나무랬다. 칭찬을 해줄 때에도 “아이구! 장한 우리 딸” 이렇게 했다.

    애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커주어서 키우기가 쉬웠다. 어쩌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밤 새워 업고 날을 새울 때는 어려웠다. 젊어서 35세 쯤에는 장사를 하느라고 애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서 미안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좀 더 잘 먹이고 입히지도 못하고 가정 살림이 풍부하지 못해서 잘 해주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끼니를 안 굶길려고 무척 애를 썼고 지금 생각해도 밥 세 끼를 먹인 일은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43살, 큰 딸이 24살 때 시집을 보냈다. 그 때 옥천군 이원면에 살고 있었는데 친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살아 계셨다. 이원면에서는 이웃과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이웃형님 갈벌네와 참 친하게 지냈다.

    40대와 50대는 항상 일만 했다.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계시고 큰 딸 하나 시집 갔는데 밑으로 5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느라고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

    공장에 다닐 때에는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재미있게 놀기도 했다. 이순자 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잠깐 시간이 날 때는 막걸리를 사다가 나눠먹고 놀기도 했다.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살기가 조금씩 나아졌다. 힘들 때에는 그저 팔자려니.. 생각하고 혼자 삭혔다.

    자식들 6남매 모두는 착하고 성실해서 말썽을 부리거나 싸움을 하는 일은 없었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 3년을 20리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도시락에 보리밥을 싸주니까 가져가지를 않았다. 하루는 너무 늦게 오길래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했더니 버스비가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버스비를 100원씩 매일 주었다. 먼 길에 점심도 굶고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생각하니 무척 가슴이 아팠다. 힘든 살림에 애들 용돈 한번 주지 못했지만 6남매는 모두 착하게 잘 컸다.

    큰 딸이 시집가서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기쁘기도 하고 딸이 애기를 낳느라고 고생한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손자를 처음 데리고 왔는데 첫 눈에 감동을 받았다. 그 이후로 줄줄이 손주들이 태어났고 나는 손주들이 놀러오면 항상 용돈을 빠지지 않고 꼭 준다. 내 자식을 낳아서 기를 때보다 손자를 낳아서 키울 때가 더 소중했다. 내 손주는 안기승(25살), 안혜정(22살), 송은희(15살), 송윤정(13살), 이지은(14살), 김도훈(12살), 김보경(7살)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아이들이 잘못해도 때리지 말고 항상 말로 타이르고 학원을 너무 많이 보내지 말라고 한다. 시간이 되면 손주들 손잡고 공원 같은데 가서 놀고 싶다. 이 다음에 손주들이 나 없을 때 “옛날에 할머니가 용돈을 잘 주셨는데..”하며 내 이야기를 할 것 같다.

    <계속>

    이 기사의 글과 사진, 만화는 부천시문해교육협의회에서 발간한 <늦깎이 학생이 펼치는 인생 수록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참고로 글을 쓴 주인공은 한글을 처음 배운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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